체념 체념 봄 안개 자옥히 나린 밤거리 가등(街燈)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凝視) 혼자 정열.. 감동시 2017.03.25
아버지 아버지 어릴 때 내 키는 제일 작았지만 구경터 어른들 어깨 너머로 환히 들여다보았었지 아버지가 나를 높이 안아주셨으니까 밝고 넓은 길에선 항상 앞장세우고 어둡고 험한 데선 뒤따르게 하셨지 무서운 것이 덤빌 땐 아버지는 나를 꼭 가슴 속, 품속에 넣고 계셨지 이젠 나도 자라서 기.. 감동시 2017.03.25
숲에 비가 옵니다 숲에 비가 옵니다 숲에 비가 옵니다 숲 너머로 숲의 세상이 보입니다 정겹게 소곤소곤 하나, 둘, 셋, 넷 나무와 나무, 풀과 풀이 서로를 건너고 있습니다 세상의 창을 열고... 비껴가지 않는 삶에 닿고 싶어... 참을 수 없는 그리움, 이팝나무 하얀 마음 보듬고 싶어... 서로에게 내려서는 법.. 감동시 2017.03.25
벗에게 부탁함 벗에게 부탁함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 감동시 2017.03.25
밀물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시 : 정끝별 감동시 2017.03.25
마늘촛불 마늘 촛불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 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 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감동시 2017.03.25
다릿목 다릿목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을 지나면 우우 부는 솔바람도 그 날 그 소리 조잘대는 개울물도 그 날 그 소리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을 지나면 소근대던 영이 말이 귀에 들릴 듯 나긋한 영이 손이 불쑥 잡힐 듯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은 멀어도 영이가 생각나면 찾아가는 곳 보고프면 .. 감동시 2017.03.25
길 길 비 오자 통도사 극락선원 섬돌 위로 달팽이 한 마리 자신의 집을 지고 찾아온다 집과 같은 업을, 업과 같은 집을 버리고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가고 싶다며 흐르는 물처럼 떠돌며 살고 싶다며 여름 선방으로 달팽이 한 마리 찾아온다 오동잎 아래에서 비 피하면 노승이 비켜서고 일대기.. 감동시 2017.03.25
기다림 기다림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 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 밤,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 감동시 2017.03.25
강정모리에서 강정모리에서 세상과 실강이 하다 시벌시벌. 그 성질머리 못 버리겠거든 행기 숲 아래 물굽이 휘돌아가는 강정모리를 걸어보라 덕유산 백리 물길 태극 문양 꼬여드는 물음표 마냥 여기까지 따라와 허우적거리는 이야기들 제 아무리 웃긴다 한들 강정모리 휘돌아 나가지 않고서는 자연스.. 감동시 2017.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