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항산
휴일의 아침은 느긋하게 늦잠을 즐길 수 있어 좋다. 9시 20분 집을 나서 가음정 시장으로 갔다. 골목 안 김밥 집을 찾았으나 문이 닫혀 있다. 발길을 돌려 윤선생 집으로 차를 몬다.
9시 50분 대문 앞에서 크락션을 울리니 사모님이 웃으며 반긴다. 윤선생이 이발하러 미용실에 갔다나. 이발을 미용실에서 한다?
창원역 앞 노변에서 만나기로 한 안선생과 약속한 시간은 이미 40여분이나 지나버렸다. 서둘러 차를 몰고 약속 장소에 다다르니 안선생은 노변 화단에 앉아 느긋하게 신문을 보며 기다리고 있다. 우리를 맞는 그의 표정이 하도 밝고 온화하여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동마산 I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하니 차량의 정체 현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중리를 빠져 나가자 길은 훤하게 뚫려 단숨에 함안IC에 도착한다. 차는 함안 읍내를 통과 진동, 여항 방면 국도를 타고 달린다. 아라 국민학교를 지나 300m쯤 가니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우회전하면 파수리 쪽. 파수 농공단지를 지나 5분쯤 달리면 미산 부락에 당도한다.
노변에 드문드문 몇 백 년 묵은 정자나무들이 장엄한 자태로 길손의 시선을 압도한다. 고목 특유의 기형과 굴곡, 화려한 원색으로 채색된 채 보도에 뒹구는 낙엽들이 늦가을 한적한 시골길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길 양편 들녘에는 감나무들이 많다. 감들은 이미 다 수확해 버렸고 빈가지 끝에 달랑 감 한 개 달렸다.
마을 입구의 노변에 차를 주차시키고 마을 뒷편 감나무 밭을 지나는 소로를 타고 산으로 오른다. 미산 마을은 여항산 아래에 자리 잡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곳곳에 감나무 밭이 산재해 있고 수확한 감들은 부인네들의 손길을 거친 후 먹음직한 곶감으로 농가 뜰에 매달려 있다. 다음번 산행 시에는 이곳 곶감을 사다가 아이들에게 주어야겠다. 파수 곶감은 조선시대 나랏님께 드리는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호젓한 산길은 산허리를 감고 돌아 비스듬히 오르는데 낙엽이 길을 뒤덮어 발목이 반이나마 잠긴다. 낙엽수의 단풍잎과 솔잎이 10cm이상 쌓여 길은 묻혀 버렸고 그 위를 밟고 지날 때 발바닥에 전해지는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은 정말 즐겁다. 서너 팀 정도 산행객들을 만났으나 붐비지 않고 한가하다. 자연 상태로 잘 보존된 산행 길은 호젓하여 매력이 있다.
소사 군락지를 지나 완만한 숲길을 1시간여 걸으니 길옆에 제법 넓은 평지가 나오고 그곳에 앙징스러운 조그만 샘이 있다. 돋을샘이라는 표말이 서 있다. 먼저 온 산행객 4인이 점심을 먹고 있다가 우리 일행을 반긴다. 컵에 샘물을 받아먹으니 물맛이 너무도 좋다. 차고 담백한 그 맛은 도회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진미이다.
소로를 따라 30여 분 쉬지 않고 오르니 능선 정점, 삼거리에 이른다. 이정표가 정상과 미산령 양편으로 등지고 섰다. 능선을 타고 평탄한 길을 20여 분 가니 헬기장이 나온다. 선착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다. 억새 풀밭 여기 저기 음식 찌거기와 쓰레기들이 보인다. 버린 자들의 몰상식한 행위에 분노를 느낀다.
헬기장을 지나 200m쯤 나아가니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좌측으로 하산하면 퇴천 마을이다. 곧장 직진하여 10여 분을 가니 마침내 정상에 이른다. 일망무제로 탁 트인 시야에 주변 산군이 머리를 숙이고 조아린다. 멀리 북으로 함안, 남으로 진동, 서로 군북 땅이 아련히 보인다. 산정에서 먹는 점심은 정말 맛있다. 세속의 맛과는 천양지차다.
하산은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와 삼거리 분기점에서 미산령 코스를 택한다. 능선을 타고 계속 내려오면 산림도로를 만난다. 지프차나 오를 수 있는 길을 따라 1시간여를 걸으니 길 좌측에 관광농원이 있다. 농원을 지나 10여 분 걸으면 큰 저수지를 만나고 이를 지나면 바로 미산 마을에 도착한다.
4시 30분경 승용차를 타고 함안IC를 거쳐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귀가 차량들로 정체 현상이 심하다. 소계동 안선생댁 근처 노변에 주차시키고 시장 안 횟집에 들러 소주잔을 기울이니, 마음은 푸근하고 세상에 부러운 게 없다. 이게 사는 즐거움이 아닐까? 다음 주에는 어디로 가볼까? 마음은 벌써 한 주를 앞서 가고 있다.
1994.11.13 jb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