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같이 근무하던 분이 직장을 떠나면서 시집을 선물로 주고 갔다. 계약직으로 한동안 함께 근무했는데 작별하면서 고맙게도 아름다운 시집을 주셨다. 덕분에 좋은 시를 많이 읽게 되어 그 분이 너무 고맙다.
안도현 시인이 엮은 시집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를 읽어면서 마음을 울린 시들, 싯구를 적어보았다. 감동과 여운을 때때로 되새기고 싶어서...
읽은 책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안도현 엮음
정호승 시 밥그릇 중에서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 그릇을 핥아보았나
문신 작 살구꽃 중에서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
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중략-----------------------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하게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생략---
태백산행 정희성 작
눈이 내린다 기차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언젠가 이정록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들여다보면 어디에든 시가 있지요."
세상의 만물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를 언어로 묘사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뜻이다.
불혹 혹은 부록
강윤후 작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고니발을 보다
고형렬 작
고니들의 기다란 가느다란 발이 논둑을 넘어간다
넘어가면서 마른
풀 하나 건들지 않는다
나는 그 발목들만 보다가 그 상부가 문득 궁금했다 과연 나는
그 가느다란 기다란 고니들의 발 위쪽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얼마나 기품 있는 모습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고니 한 식구들이 눈 밭 위에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섰다
고니들의 길고 가느다란 발은 정말 까맣고
윤기 나는 나뭇가지 같다
(그들의 다리가 들어올려질 때는 작은 발가락들이 일제히 오므라졌다
다시 내디딜 땐 그 세 발가락이 활짝 펴졌다)
아 아무것도 들어올리지 않는!
반짝이는
그 사이로 눈발이 영화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내게는 그들의 집은 저 눈 내리는 하늘 속인 것 같았다
끝없이 눈들이 붐비는 하늘 속
고니들은 눈송이도 건들지 않는다
아, 오월
김영무 작
파란불이 켜졌다
꽃무늬 실크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 끼고
횡단보도 흑백 건반 탕탕 퉁기며
오월이 종종걸음으로 건너오면
아, 천지사방 출렁이는
금빛노래 초록 물결
누에들 뽕잎 먹는 소낙비 소리
또 다른 고향 강변에 잉어가 뛴다
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작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월식
강연호 작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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