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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을 가며
수렴동 대피소 구석에 꼬부려 잠을 자다가
밤중에 깨어보니 내가 아무것도 덮지 않았구나
걷어찬 홑이불처럼 물소리가 발치에 널려 있다
그걸 끌어당겨 덮고 더 자다가 선잠에 일어난다
먼저 깬 산봉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쫓겨서
옷자락 하얀 안개가 나무 사이로 달아난다
그 모습이 꼭 가사자락 날리며
부지런히 산길을 가는 스님 같다
흔적 없는 삶은 저렇게 소리가 없다
산봉들은 일찍 하늘로 올라가 대화를 나누고
아직 거기 오르지 못한 길 따라 내 발이 든다
길 옆 얼굴 작은 풀꽃에 붙었던 이슬들
내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물소리가 갑자기 귀로 길을 내어 들어오고
하늘에 매달렸던 산들이
눈 안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오르지 못한 길 하나가 나를 품고 산으로 숨는다
시 : 이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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