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아리산 일출과 타이완 관광

雲舟미카엘 2011. 9. 2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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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 일출과 타이완 관광

 

 

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렘과 혹시나 기상 시간이 늦을까 하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서둘러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서니 거리엔 간간히 질주하는 차량만 보일뿐 적막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은 매우 차가왔고 어둠 속에 가로등 불빛이 을씨년스럽다. 초조히 얼마간을 기다리다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허과장이 먼저 와 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곧 김교장 부부가 당도한다. 추위를 잊을겸 자판기의 커피를 뽑아 마시고 있으려니 기다리던 관광버스가 도착한다.

김해공항에서 서울행 아시아나 항공 OZ 910호기를 탑승, 07:10분 출발, 서울로 향했다. 날씨는 아주 맑았고 구름도 솜털처럼 사랑스러웠다. 국내선 청사를 빠져나와 공항버스를 이용 국제선 청사로 이동 타이베이행 CATHAY PACIFIC항공 CX 421기를 탑승,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이륙 후 한 동안 쪽빛 서해 바다와 섬들이 아득히 멀리 그림처럼 보였다. 비행기가 구름 위를 날자 시야엔 온통 솜털 같은 구름과 쪽빛 하늘뿐, 눈 덮힌 시베리아 대평원 위를 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날씨는 너무도 화창했고 비행기는 정지한 듯 날아가는 것 같지 않다. 속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

아리따운 스튜어디스가 가져온 기내식을 먹었다. 메뉴는 오렌지 쥬스, 과일 샐러드, 오믈렛, 소시지, 감자, 채리 토마토. 쇠고기와 참새우 꼬치구이 , 감자 튀김, 토마토와 시금치, 케이크, 롤빵과 버터였다. 식후엔 와인과 커피를 서비스했다. 국내선 여객기에서 받을 수 없는 후한 서비스였다. 화이트 와인의 맛이 구미를 당겨 거푸 2잔을 마시고 보니 취기가 돌고 알딸딸 즐겁다.

12:05분 중정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현지 가이드가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청사를 빠져 나오니 대만인 기사가 운행하는 관광버스가 우리 일행을 맞아준다. 버스는 그 구조가 좀 특이하다. 1층에는 짐을 싣는 짐칸과 운전기사석이 있고 승객의 좌석은 2층에 배치되어 있다. 우리 버스보다 한결 편리한 구조인 것 같아 호감을 느꼈다.

도원 시내 홀리데이 호텔 내 식당에서 중국 요리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탁에 놓인 물주전자가 너무도 낡은 고물이라 충격을 받았다. 뚜껑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버렸고 실로 뚜껑과 주전자 몸체를 이어 놓았다. 한국에서는 쓰레기통이나 고물상에 있을 법한 낡고 추한 주전자가 호텔 식당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으니 한편으로 중국인의 검소함에 감탄했다. 식탁보를 들쳐 펴보니 식탁 또한 칠이 벗겨지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검소함을 칭찬해야 할지 무신경을 나무라야 할지 모르겠다. 음식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대만 서부 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타고 우리 일행은 아리산으로 향했다. 기후는 우리나라 초여름처럼 다소 더웠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넓은 평야,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우리의 김해평야를 보는 듯하다. 고층 건물도 그다지 없고 곳곳에 중소 규모의 공장들이 무리를 이루고 밀집해 있다. 들판과 거리엔 사림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낮에는 모두들 직장에서 일하다 보니 거리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대만인들은 거의가 맞벌이 부부이며 여성들도 거의 취업하여 직장 생활을 한단다. 들녘 논밭 사이사이엔 나무를 많이 심어두었다. 4월 이후 자주 내습하는 태풍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방편이란다.

대중시를 지나 가의 시내에 접어드니 거리 양편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오토바이 및 자동차 판매 상점이다. 자동차를 汽車라 명명하고 오토바이를 機車라 부르고 있어 놀라왔다. 근로자들이며 젊은이들은 거의가 오토바이로 출퇴근하고 18세 이하 학생들은 자전거를 애용하고 있다. 인도에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주차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들녘에 간간히 자주 보이는 저수지는 양어장이라고 한다. 고속도 중앙분리대는 우리처럼 시멘트 방벽이 아니고 양편에 방벽을 설치하고 그 가운데 키 작은 정원수를 심어 운치가 있다. 거리의 간판들은 모두 한자로 기록, 외국어 간판을 찾아볼 수 없다. 대만인의 자존심에 고개가 숙여진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길가의 건물들이 깨끗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오히려 낡고, 더럽고, 흉하다. 검소한 건지, 게으른 건지, 바빠서 그런지 모르겠다.

고속도로엔 승용차보다 화물차량들이 더 많이 보인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우리보다 심하지 않는 듯하다. 농촌 경제가 도시 못지않은 것 같다.

차는 어느덧 고속도를 벗어나 동으로 국도를 달려 아리산으로 향한다. 동부지역은 산악지대이고 서부지역은 평야 지대이다. 동고서저의 지형으로 북에서 남으로 길게 산맥이 2개 뻗어 있다. 우리나라와 지형상 유사하다. 동부 지역으로 갈수록 점점 산들이 많이 보인다. 고도가 높아진다.

가이드가 간간히 우리들에게 대만의 역사, 문화, 풍속들을 안내한다. 대만에는 예식장과 목욕탕이 없다고 한다. 결혼식은 식당에서 한단다. 들녘 중앙에 작은 집모양의 가족 무덤들이 보인다.

가이드로부터 아리산 오봉선사 설화를 듣는다. 아리산 토인들은 산 사람을 그들이 믿는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의 풍속이 있었다. 오봉 선사는 이 악습을 중지할 것을 수차 토인들에게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오봉선사는 토인 추장을 불러 모일 모시 모장소에 가면 신에게 바칠 훌륭한 제물용 인간이 있을 터이니 그를 붙잡아 신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토인들은 선사가 시키는 대로 그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난후 뒤늦게 그가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오봉선사였음을 알고 탄식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후 인신공양의 악습을 버렸다고 한다. 아리산 지역 토인들은 지금도 오봉선사를 우러러보며 그의 고귀한 덕을 추모하고 있단다.

아리산 오르는 길은 지리산 성삼재 오르는 길과 비슷하다. 산허리를 감고 빙빙 돌아 오르는 데 몇 바퀴를 도는지 알 수가 없다. 길가에 차 재배 농가가 자주 보이고 차 제조 판매 상점(아리산 오룡차)이 많이 보인다. 산비탈의 계단식 밭은 모두 차를 재배하고 있다.

가의현 아리산향에 소재한 아리산 빈관(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19:30분. 아리산은 해발 2500m인 고산. 구불구불한 급 커브 길을 몇 십 번을 돌았는지 셀 수도 없다. 긴 여정으로 몸은 몹시도 피곤했다. 그러나 마음은 이국에 대한 호기심과 첫 해외 나들이에 대한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1월 20일. 04:30분 객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기상 시간을 알려주는 아가씨의 고운 목소리이다. 서둘러 행장을 차리고 호텔 문을 나서니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뿐 차가운 밤공기가 귓볼을 얼얼하게 한다.

아리산 火車站(화차참)에서 기차를 타고 관일루로 향했다. 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리산 일출의 장관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길고 긴 줄을 서서 승차를 기다리고 있다. 일반 관광객, 중고 학생들, 수도승, 각양각색의 사람들... 기차와 역사는 우리나라 70년대 시골 역에서나 볼 수 있는 볼품없는 꼴이다.

대만의 국민소득은 94년 기준 1,2000$, 우리보다 5,000$ 정도 더 많은 잘 사는 나라인데 건물이며, 옷차림이며 눈에 띄는 이들의 생활상은 우리보다 못해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한국인이 內貧外華形이라면 이들은 內華外貧形인가?

관일루 전망대에 서니 시간은 07:00시. 07:04분에 해가 뜬다고 가이드가 일러주었다. 전망대의 위치는 해발 2500m. 시야는 일망무제 온 산야가 발 아래 수만리 밑에 아득히 있고 운무가 자욱히 깔려 바다 물위에 떠 있는 듯하다. 동편 멀리 높은 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다. 해는 이 山群 위를 뚫고 솟는다는데 이 산맥 중 우뚝 솟은 제 1봉이 대만에서 제일 높은 산 옥산이다.(해발 3950m 동북아시아 최고봉)

07:05분, 먹으로 짙게 그린 듯한 山群 위로 쨍- 찬란하고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쫙- 순식간에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아! 모두들 대자연의 장엄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의 극치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일출 구경후 다시 기차를 타고 아리산 화차참(火車站)으로 되돌아 온 후 아리산 삼림유락지구 관광에 들어갔다. 수진궁-신목(수령3000년 된 고사목)-자운사-三代木(일,이,삼대목이 하나의 나무群을 이루고 있다.)-상비목(象鼻木) 등을 관람했다. 아리산 일대는 수령 수천 년 된 고사 괴목이 무수히 많았다.

아침 식사후 숙소를 출발 일월담으로 향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붙은 길을 따라 차는 느릿느릿 달린다. 절벽 아래 아득히 골짜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정말 산은 높고 골짜기는 끝도 없이 깊다. 해발 1500m이상 지역은 전나무 삼림 지대이고, 해발 1500m-1000m지역은 우리나리 삼림과 유사했고 1000m이하는 아열대성 식물들이 군집해 밀림을 이루고 있다.

매원 산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니 시간은 12:30분 오랜 버스 여행에 지루했던지 사모님들이 마이크를 잡고, 기사가 노래방 테이프를 켜주어 버스 안은 이동 가요방이 되버렸다.

버스는 가의시를 경유 고속도를 타고 북으로 향한다. 들에는 농민들이 논에 물을 대놓고 모내기를 하고 있다. 이들은 한 해에 2모작, 3모작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고속도 톨게이트를 몇 군데 지났는데 톨게이트라 하지 않고 수비참(收費站)이라고 그들 말로 조어하여 사용하고 있다. 본받을 만한 모국어 사랑이다. 논에 물을 댄 소규모 못들이 간간히 보여 가이드에게 문의하니 오리 양식장이라고 한다. 대만인들은 소득 작물로 오리를 많이 사육하고 있다.

차창 밖으로 대만의 소도시와 농촌 풍경을 유감없이 볼 수 있었다. 자동차 폐차장, 고물 자동차, 소규모 기계 공장들이 자주 보이고, 고속도로 통행 차들 중 한진 해운의 컨테이너차, 기아의 프라이드 승용차도 몇 대 보인다. 이국에서 우리 차들을 보니 반갑고 뿌듯하다.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경운기 개조 차도 보인다.

대중에서 일월담 가는 길 도중에는 터널이 상당히 많았다. 5여개의 터널을 통과했고 길가 들녘엔 빈낭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바나나 재배 농가도 많이 보였고 간혹 키 큰 종려나무가 가로수로 줄지어 서 있기도 했다.

두 시간 가량 달려 일월담에 도착했다. 일월담은 해발 780m의 고지대에 위치한 대만 최대의 천연 호수이다. 호수 가운데 섬 하나가 있으며 장개석 총통의 하계 휴양지로 유명하다. 호수 가장자리 한 곳에 천연 분수가 솟아나오고 있다. 물 밑에서 3-4m의 물기둥이 불끈 솟아 올라 분수처럼 물줄기를 솟구쳐 올리는데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했다.

일월담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터에 문무묘가 웅장하고 장엄한 자태로 서 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숭배하는 사당으로 대만인들이 대단히 신성시 하는 성전이다.

일월담 관광 후 초둔시를 경유 타이베이로 향했다. 초저녁 시간 주택가 주택엔 대부분 불이 켜 있지 않았다. 시가지는 어둡고 사람들 왕래도 적었다. 주민들이 직장에서 아직 귀가하지 않아 그렇다고 한다. 대만 사람들은 남녀노소 노는 이가 없는 듯하다. 유리창에 창살을 한 집이 아주 많은데 아마 도난 방지용인 둣하다. 먼지와 녹이 잔뜩 슬어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 홍등이 켜져 있는 방이 있는데 이곳은 이들이 신봉하는 신들을 모셔둔 사당이다. 이들은 조상신이나 불교, 도교를 신봉하고 신앙심이 매우 깊다고 한다.

대만인들은 결혼식을 찬청에서 하고 (예식장이 따로 없다.) 예식은 밤에 한다. 결혼예물, 혼수 등 비용은 신랑측이 부담하고 신부측은 돈을 안 쓴다. 신부측 친척들은 신부에게 패물(금)을 주로 선물하고 신부는 결혼식 날 이 패물을 착용하여 하객들 앞에서 자랑한다. 하객들이 대개 많이 참석하여 부조금으로도 예식 비용을 다 충당하고 남는다고 한다. 예식장은 없지만 장례식장은 성업 중이다. 이들은 장례식을 거창하고 화려하게 치르는 풍속이 있다. 여행 중 장례 행렬을 몇 번 보았는데 온통 생화로 화려하게 장식한 운구차 수 대가 긴 행렬을 이루며 가는 것을 보았다.

20:30분 타이베이시 장수한국고육찬청에 도착 저녁 식사를 했다. 이 집은 한국식 불고기 전문점으로 종업원들이 한국어를 잘 했다. 식당에는 손님들로 북적댔고 한국인 관광객도 상당히 많았다. 오랜만에 우리 음식을 먹으니 반갑기도 하고 구미에 맞아 많이 먹었다.

식사 후 숙소인 용보대반점(FORTUNE DRAGON HOTEL)으로 향했다. 숙소는 타이베이시 중심가에 소재한 대규모 일급 관광호텔이었다.

 

1월 21일. 08:50분 숙소를 출발 고궁박물관 관광에 나섰다. 국립 고궁박물관은 중국 문화재 72만 8천점을 소장하고 있다. 장개석씨가 1948년부터 49년에 걸쳐 남경 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이곳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중국의 수많은 문화재중 국보급 최상품만을 모조리 수집, 전란을 피해 이곳 박물관에 옮겼다고 한다. 대만인들은 이 문화재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장개석 총통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고 존경해 마지않는다고 한다.

1층 전시실에는 주로 상(商)나라 이전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송대(宋代)에서 청대(淸代)까지의 도자기 유물, 3층은 淸代의 각종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화려함, 정교함, 예술적 아름다움이 정말 놀랍다. 우리 문화재와는 우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양이 많았고 또 다양했으며 예술적 기교 또한 놀랍고 신비로왔다. 과연 중화사상을 가질만한 대국이라고 여겨졌다. 일정에 쫓겨 인류 최고의 예술품들을 찬찬히 여유 있게 둘러보지 못하고 주마간산(走馬看山)하듯 후딱 둘러보고 나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청 서태후가 특히 애장(愛藏)했다고 하는 자단나무에 벽옥으로 조각한 병풍은 정말 훌륭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일행은 충렬사로 향했다. 충렬사는 중화민국 건국 유공 선열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대만인들이 숭배하는 곳이다. 1시간 동안 부동자세로 눈 하나 깜짝 않고 서 있는 정문 초병은 어찌 보면 마네킹 같다. 1시간 후 다른 초병과 교대를 한다고 한다. 무더운 날씨에 꼼짝 않고 서 있으려면 여간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그 군인 정신에 감탄했다.

점심 식사 후 타이베이시에서 동북부 해안지대에 있는 야류국립공원(대북현 만리향 소재)으로 떠났다. 기륭시 근교에는 대규모 신축 아파트들이 서 있었고 길가 전봇대에는 집 파는 광고 간판이 많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색다른 광경이라 눈길을 끌었다. 해변 산록에는 콘도들이 건설되어 있고 항구에는 많은 선박들이 정박해 있다. 멀리 서태평양 푸른 바다가 보였다. 해변에 횟집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중국인들은 생선회를 먹지 않고 모두 익혀 먹는다고 한다. 참 요상한 사람들이다. 14:50분 야류국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매표소를 통과했다.

야류국립공원은 해변의 암벽이 해식작용으로 인하여 절묘한 형태의 기암괴석을 이루어 정말 장관이다. 자연의 신비한 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왕관을 쓴 여왕의 형상, 여인의 풍만한 유방과 유두, 여인의 허벅지와 음부, 나팔관과 자궁, 아리따운 젊은 여인의 고운 뒷머리 모습, 샌달 모양의 암벽 등 인간이 바위에 인공으로 다듬는다 해도 만들지 못할 절경을 바닷물이 수천 년에 걸쳐 이룬 대자연의 조화의 극치이다.

타이베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국립 진주홍보 센터에 들렀다. 관광객을 상대로 진주를 판매하는 곳이다. 판매 전략이 치밀하고 홍보물 준비도 잘 되어 있다.

저녁은 몽골리안 바베규 식사를 했다. 생고기(쇠고기, 염소 고기, 닭고기, 사슴고기)와 양념, 야채들을 뷔페 식당처럼 진열해 놓고 손님이 먹고 싶은 대로 쟁반에 담아 요리사에게 주면 요리사가 즉석에서 익혀 손님에게 음식을 주는 시스템으로 된 특이한 음식점이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먹고 싶은 대로 수차 되풀이 이용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신기하기도 하고 많이 먹을 욕심에 두어 차례 고기를 요리해 먹었는데 나중에는 다 먹지 못해 남기고 말았다.

퇴근 시간의 타이베이는 우리나라처럼 교통 혼잡이 극심했다. 길은 비좁고 차량들은 많고 지하철 공사로 도로는 곳곳이 차단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오토바이가 대단히 많다. 인도 및 상점 앞에는 수많은 오토바이가 주차되어 있고 퇴근 시간은 오토바이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여성들도 오토바이를 많이 탔고 짧은 치마 차림으로 질주하는 모습도 흔히 보인다.

저녁 식사 후 화서가 야시장 구경을 갔다. 시장은 불야성을 이루었고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마치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이나 국제 시장 같았다. 낮에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야시장에는 왜 그리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지 신기하다. 대만인들은 외식을 많이 한단다. 퇴근 후 밖에서 식사하고 귀가한다.

 

1월 22일. 08:40분 중정기념관 관람차 숙소를 떠났다. 중정기념관은 장개석 총통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 기념관 안 넓은 공원에는 시민들이 아침 운동을 즐기고 있었고, 군데군데 노래방 기계를 설치, 시민들이 누구나 노래를 부르며 즐기게 했다. 마침 우리가 이곳을 지날 때 일본인 관광객 2,3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09:00시 정각 기념관 개문식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대만 관광의 마지막 날. 아쉬움을 간직한 채 우리 일행은 총통부 관광을 마지막으로 중정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5:15분 다시 이 나라를 방분할 기회가 없을 듯하여 아쉬운 마음 잔뜩 간직한 채 서울행 CATHAY PACIFIC CX410기에 탑승했다. 정말 즐겁고 유익한 여행이었다. 오랫동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세계는 넓고 볼 것은 많은데, 김우중회장처럼 싸돌아 다녀나 볼까?

 

1995.1.19-1.22 jb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