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전남 강진군 관광

雲舟미카엘 2017. 3. 25.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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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관광

 

일시 : 


코스 : 김영랑 생가, 금서당, 다산초당, 사의재

  

김영랑 생가

 김영랑은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시인이다.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본명은 김윤식. 강진 태생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휘문의숙에 진학했고, 일본 아오야마(청산)학원에서 수학했다. 시문학 동인으로 활약했다. 일제의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통치에 저항했다. 한국전쟁 중 사망했다.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면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면

빛나는 잔물결 헤일 수 없지만

눈만 감으면 떠오는 얼굴

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사랑채를 둘러보려 접근하면 사개 틀린 고풍의 툇마루에시비를 발견한다.

사랑채는 1930년도에 손님맞이용으로 정자와 한옥의 멋을 살려 지었다. 사랑채를 떠

받치는 4개의 나무기둥은 뒤틀려 굽은 나무를 써 자연미를 한껏 살렸다.

 

사랑채 툇마루에 누워 두둥실 뜬 밝은 달을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개 틀린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 치씩 옮아오고

이 무루 위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녈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 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영랑은 14세에 두 살 연상인 여인과 결혼했는데 일 년 육 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첫 부인을 잃고 시 쓸쓸한 뫼 아페를 썼는데 외로움을 달래고자 시를 쓰지 않았나 싶다.

 

쓸쓸한 뫼 아페

 

쓸쓸한 뫼 아페 후젓이 안즈면

마음은 갈 안즌 양금 줄 가치

무덤의 잔디에 얼골을 부비면

넉시는 향 맑은 구슬 손 가치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열 여섯 앳된 소년의 누님 같은 부인을 사별한 슬픔의 표현이다. 부모님 몰래 아내의 묘소를 찾아가 애틋한 정을 어디다 둘 길 없어 산소 잔디에 얼굴을 부비는 광경이 떠 오른다.

 

사랑채 우측 넓은 뜰에는 여러 개의 모란 화단이 있다. 모란이 필 때는 참으로 장관이겠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 모란 잎들은 내년에는 더 좋은 꽃을 피우기라도 하려는 듯 싱싱하고 푸른 잎들을 자랑하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 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은 스물 세 살 때 3년 연하의 여인 김귀련과 재혼해 슬하에 73녀를 두었다.

    

금서당

강진 영랑생가 위쪽 보은산 선인봉 중턱에 있다. 원래 서당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보통학교로 사용되었다. 영랑이 이곳에서 수학했다. 강진 신학문의 요람이었다. 3.1운동 때 이곳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해방 이후 김영렬 화백이 이곳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다산초당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소나무 뿌리가 지표 밖으로 자라 길을 만들어 놓았다. 시인 정호승은 이 길에서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남겼다.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뿌리의 길을 밟으면서 다산의 튼실한 뿌리를 느꼈던 것 같다.

수백 년 된 굵은 소나무 뿌리가 지상으로 뻗어 나와 서로 뒤엉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거대한 식물성 파충류들이 이리저리 꿈틀꿈틀 산길로 기어가는 듯하다.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배된 다산 선생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의 뿌리는 백성이고 정치의 뿌리도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셨는가 싶다. 뿌리의 길은 다산선생의 애민정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뿌리의 길을 통해 국가든 개인이든 우리 삶의 근본과 본질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힘차게 지상으로 뻗어 나와 얼기설기 얽힌 뿌리의 모습이 다산선생의 고뇌와 애국충정처럼 느껴진다. 세대와 계층과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진 오늘날 우리사회의 난맥상처럼 느껴진다.

 

뿌리의 길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들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정약용은 강진 귀양살이 시절에 근심에 싸여 지내며 憂來라는 12수의 시를 남겼다.

 

憂來(우래) 근심이 온다

 

脣焦口旣乾(순초구기건) 입술 타고 입은 이미 바짝 말랐고

舌敝喉亦(설폐후역사) 혀 갈라져 목구멍도 쉬어버렸네

無人解余意(무인해여의) 내 마음 아는 이 아무도 없고

駸駸天欲夜(침침천욕야) 어느새 한밤이 되려하누나

 

醉登北山哭(취등북산곡) 술 취해 북산에 올라 통곡하니

哭聲于蒼穹(곡성우창궁) 울음소리 하늘 까마득히 사무치건만

傍人不解意(방인불해의) 가까운 이도 내 심중 헤아리지 못하고

謂我悲身窮(위아비신궁) 슬픔마저 궁상스런 신세타령이라네

 

酗誶千夫裏(후수천부리) 술 취해 꾸짖는 천 사람 중에

端然一士莊(단연일사장) 단정한 선비 한 사람 위엄 있고 엄숙하네

千夫萬手指(천부만수지) 술 취한 천 명 모두 손가락질하면서

謂此昵夫狂(위차일부광) 단정한 선비 하나 미쳤다고 말하네

 

술 취한 주정뱅이들이 자신들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모르고 한 사람 정신 말짱한 사람을 오히려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세상 임금의 총애로도 지켜줄 수 없었던 한 천재의 정치적 역경이 시작되었고 나이 삼십의 초입에서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천재는 유배지에서 울분과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귀영화의 허망함, 타락한 세상에 대한 근심걱정, 덧없는 세월에 대한 허무 초초한 심정 등을 토로하고 있다.

 

四宜齋(사의재)

 다산이 강진에 귀양와 살 때 거처하던 집이다. 그 집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고 했다. 강진 유배시 처음 묵었던 주막집이다. 주모가 다산의 딱한 사정을 알고 내어준 골방이었다. 다산은 사의재라는 당호를 걸고 여기서 심신을 수양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6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이곳에서 4년간 기거했다고 한다.

사의재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한다. 외모는 마땅히 엄숙, 단정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한다. 행동은 마땅히 무거워야 한다.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이다